얼음장 같은 전동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다들 제 잘못이라고 하셨죠. 제가 엄마를 밀어버렸다고요. 절 지금까지 살려주신 것도 혈육의 정 때문이 아니라 그 추악한 진실을 덮기 위한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 아닙니까?”전씨 일가 사람들은 말끝마다 전동하를 배은망덕한 자식이라고 불렀다.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고 말이다.‘키워준 은혜? 당신들이 나한테 준 상처는? 그렇게 쉽게 잊혀질 줄 알았어?’낳아준 생모의 얼굴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지만 그날 그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전동하의 꿈에 나타나곤 했다.사실 엄마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무책임한 여자였다.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은 것도 전동하를 방패삼아 전씨 일가 안방을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 때문이었다.하지만 사생아 따위 버려도 상관없다는 전인국의 태도에 받은 충격은 정신질환으로 이어졌고 죽는 날까지 그 그림자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느라 아들을 제대로 바라볼 여유 조차 없었다.그럼에도 그녀의 죽음에 전동하가 절망스러웠던 건 엄마가 죽은 뒤로 그의 앞에 더 끔찍한 지옥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약 20년 동안 전동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난 도대체 왜 태어난 걸까? 이리저리 치이고 버림받고 미움받을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그런 그에게 동생인 전동준은 삶의 희망을, 마이크는 그에게 삶의 동력이 되어주었었다.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주 오래전 스스로 비루한 목숨을 끊어냈을 것이다.그런 그가 최근 처음 살아있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그의 앞에 나타난 소은정 덕분에 이 세상의 따뜻함이라는 걸 처음 느끼기 시작했고 그녀 옆에 있으면 틈 날 때마다 그를 심연으로 끌어당기던 우울감도 사라지는 듯했다.하지만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가 차분한 척, 친절한 척 하는 얼굴 뒤에 징그러운 악마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아들의 말에 방금 전까지 분노로 타오르던 전인국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네... 네가 그걸
“전동하!”전인국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그가 냉정을 되찾기 위해 한참 동안 심호흡을 이어갔다.‘어떻게 일군 회사인데. 이대로 다 잃을 순 없어.’“내가, 내가 도와줄게. 내가 대표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이사들 설득하마. 하지만 전인그룹을 네가 통째로 가지는 건 절대 안 돼!”이에 여유롭게 손목을 돌려 시간을 확인한 전동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소파에서 일어섰다.“아버지, 협상도 자격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겁니다.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세요? 이제 며칠 뒤면 이 세상에서 전인그룹을 사라지게 될 겁니다. SF그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거예요. 그리고 그 그룹에 당신들 자리는 없을 겁니다.”“뭐... 뭐라고?”전인국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전인그룹으로서 일궜던 모든 걸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니?다 키운 숲을 전부 불태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묘목을 심는 거나 다름없는 결정이었다.‘독한 놈...’하지만 전동하의 눈동자는 자신감으로 빛났다.“앞으로 또 허튼 짓 하시면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산소호흡기 떼어버릴 테니 알아서 하세요.”전기섭의 목숨으로 협박하자 전인국이 벌떡 일어섰다.“지...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방금 전까지 그렇게 화를 내던 사람이 기가 팍 죽었네. 전기섭 목숨이 그렇게 소중한가 보지?’이런 생각에 전동하의 눈동자가 혐오감으로 물들었다.“네, 협박 맞습니다. 이보다 더 잘 통하는 협박이 있을까요? 신중하게 행동하세요. 당신한테 남은 마지막 아들입니다.”전인국의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졌다.협박? 애원? 구걸?‘내가 어떻게 해야 저 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전인국은 왠지 전동하가 낯설게 느껴졌다.한때 전인국은 전동하의 소식을 전부 차단했었다. 아니, 그 이름 조차 귀에 담고 싶지 않았다.사생아이자, 살인의 목격자.전동하는 그에게 인생의 커다란 오점 같은 존재였고 무시하다 보면 언젠가 지워질 거라 생각했었는데...그의 방치로 인해 그
할 일을 마친 전동하는 조용히 귀국했다.사실 미국에서 일주일은 있으려고 했지만 소은정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전동하가 물고기라면 소은정은 물과도 같은 존재. 그녀에게 조금씩 멀어질수록 숨이 턱턱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한편, 윤이한은 전인국과 대면한 전동하의 기분이 엉망이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심지어 이대로 사직서라도 써야 하나 망설이던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전동하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기분이 나쁘긴커녕 굉장히 홀가분한 표정으로 모 브랜드의 가방 디자인이 별로라는둥, 소은정이 언젠가 입었던 코트도 별로였다는 등 시덥지 않은 얘기를 건넸다.“저번에 소 대표님이 입으셨을 땐 예쁘다고 칭찬하셨잖습니까? 설마 거짓말을...”의아한 표정의 윤이한이 말끝을 흐렸다.이에 전동하가 싱긋 웃었다.“거짓말은 아니죠. 은정 씨는 이쁜 게 맞으니까.”소은정의 유일한 취미는 쇼핑, 게다가 피팅할 때마다 이건 어떠냐? 어느 게 더 낫냐는 등 질문 세례를 던지는 그녀에게 맞추기 위해 패션의 패자도 모르던 전동하도 언제부터인가 패션 잡지를 읽어보기 시작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안목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고 예전엔 전부 똑같아 보이던 여성용 가방이나 의류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잠시 후, 오피스텔.차에서 내린 전동하가 쇼핑백들을 챙겨들었다.“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윤이한이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전동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별일 없으면 연락하지 마시고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전동하는 미련없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소은정은 출근을 한 건지, 텅 빈 오피스텔이 그를 맞이했지만 그녀의 공간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양손 가득 든 쇼핑백을 옷방에 넣어둔 전동하는 그의 서프라이즈 선물에 환하게 웃을 소은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다니. 나도 참 단단히 미쳤네.’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전동하가 오피스텔을 쭉 둘러보았다.전체적으
전동하의 목에 팔을 꼭 감은 채 대롱대롱 매달린 소은정의 모습은 얼핏 보면 아기 코알라 같기도 했다.생각보다 훨씬 더 열정적인 그녀의 스킨십에 전동하 마음 역시 달콤해졌다.“많이 보고 싶었나 봐요?”전동하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한편,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이던 소은정은 놀랍게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헤어진 지 겨우 이틀인데,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걸까?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성인이 되고 나선 혼자 지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음에도 전동하가 떠난 그 이틀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평소엔 아늑하기만 하던 집이 왠지 공허했고 전동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은 너무나 쓸쓸하기만 했다.‘아, 이런 게 외로움이라는 건가?’어느새 그녀의 삶을 물들여버린 전동하, 이제 정말 이 남자를 벗어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 정도였다.‘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잠깐 포옹 끝에 전동하의 따뜻한 입술이 소은정의 달콤한 입술에 닿았다. 이틀 동안의 그리움을 풀어내기라도 하 듯 두 사람 사이의 불꽃은 빠르게 달아올랐다.소은정의 손이 슬슬 작전을 시작하려던 그때, 전동하가 그녀를 살짝 밀어낸 뒤 허리를 움켜쥐었다.“왜요?”소은정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키스 때문에 살짝 물든 뺨을 보고 있자니 그날 밤 너무나 매혹적이었던 소은정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고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지만 전동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배고프죠? 일단 밥부터 먹어요.”전동하가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지만 소은정은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콩 때려버렸다.‘뭐야? 꼭 내가 밝히는 여자인 것 같잖아?’하지만 흥칫뿡을 외치며 총총총 식탁 앞으로 향한 소은정의 표정은 다시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웬만한 팬시 레스토랑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고급스러운 양식 코스 요리,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세상에나, 도
전동하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선물을 다 살펴본 소은정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옷방을 나섰다.마침 정리를 마친 전동하가 소은정을 꼭 안았다.“샤워해야죠?”왠지 에로틱하게 귀를 간질이는 그의 목소리에 소은정의 귓볼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부끄럽지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욕실문을 닫으려던 그때, 손 하나가 불쑥 문턱을 잡았다.깜짝 놀란 소은정이 고개를 돌려보니 문틈으로 들어온 전동하가 사냥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시간도 너무 늦었고 그냥 같이 씻어요.”‘하, 지금 그걸 핑계라고.’소은정이 고개를 홱 돌렸다.“안 돼요!”“될걸요?”하지만 전동하는 그녀에게 거절할 기회마저 주지 않겠다는 듯 뜨거운 키스를 이어갔다. 천천히 그녀를 욕실로 리드한 전동하가 더듬거리며 샤워부스 물을 틀었다.따뜻한 물줄기가 두 사람의 옷을 전부 적셨지만 그 누구도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전동하가 침대에 축 늘어진 소은정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자 소은정이 어딘가 겁 먹은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더는 안 돼요...”소은정은 알고 있을까? 그를 밀어내는 목소리가 얼마나 야릇한지.순간 전동하의 하체가 다시 뻐근하게 달아올랐지만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와 또 시달리는 게 아닌가 싶어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했다.“큭, 알겠으니까 얼른 자요.”이미 잠든 소은정을 안은 전동하는 그제야 어딘가 텅 비었던 마음 한 구석이 꽉 채워지는 기분이었다.‘좋다, 이런 기분... 매일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는 말... 평생 해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고마워요, 은정 씨.’다음 날,동이 트기도 전에 다급한 벨소리가 소은정의 달콤한 꿈을 건드렸다.“으음...”역시 벨소리에 깬 전동하가 소은정을 가볍게 흔들었지만 받을 생각이 없는 듯한 모습에 결국 직접 수락 버튼을 눌렀다.“네, 은해 형님.”“전 대표?”남자 목소리에 당황한 소은해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은정이 자고
역시 굳은 표정의 전동하가 소은정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꽉 주었다.“괜찮을 거예요.”전동하는 방금 전 휴대폰을 챙기는 것도 잊은 채 혼이 나간 듯 허둥지둥 집을 나서는 소은정의 모습을 떠올렸다.아름다운 두 눈의 생기가 사라질 정도로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라 전동하의 마음도 착잡해졌다.하지만 전동하의 따뜻한 위로에도 소은정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제발...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소은해가 이 새벽에 그녀에게 전화까지 했다는 건 정말 상황이 심각할 수 있다는 소리.방금 전 떨리는 손으로 소은해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그쪽도 상황이 혼란스러운지 주위의 복잡한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이때 전동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은정 씨, 이제 곧 도착해요. 괜찮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전동하가 빳빳하게 굳은 소은정의 손을 꼭 잡았다.이른 새벽 시간이라 길도 막히지 않았고 기사가 워낙 엑셀을 풀로 밟은 덕에 두 사람은 빠르게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굳은 표정으로 한 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은호, 소은해. 역시 착잡한 표정의 한시연.어딘가 무겁게 가라앉은 병원 분위기가 이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소은정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저번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건강하셨으면서... 왜 갑자기...’종종걸음으로 걸어간 소은정이 물었다.“한 원장님, 저희 아빠 괜찮은 거 맞죠?”괜찮냐고 물었지만 한번도 틀린 적 없는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역시나 한숨을 푹 내쉰 한 원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은정아, 마음의 준비 해둬야겠다. 15년 전에 너희 아버지 심장 수술 받았던 거 기억하지? 수술은 성공적이었다만... 네 아버지 나이도 있고 최근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오늘 새벽 심장마비 증세로 병원에 실려왔다. 응급처치로 지금은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이건 말 그대로 응급처치일 뿐이야. 지금 네 아버지는 시한폭탄을 가슴에 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란다.”한 원
숨 막힐 듯한 정적 끝에 소은해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이 세상에 의사가 그 한 명도 아니고... 다른 사람은? 다른 의사 부르면 되잖아.”이에 소은호가 동생을 힐끗 바라보았다.소은호 역시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무서웠지만 장남이라는 책임감이 그의 이성을 잡아주고 있었다.“일단 검사 결과부터 기다려보자. 만약 간단한 수술이라면 여기서 바로 받아도 될 테니까.”“그래. 결과 곧 나올 거야.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말을 마친 한 원장이 자리를 뜨고 다시 적막에 잠겼다.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듯한 소은정은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안색이었고 전동하가 그런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한편, 소은해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병원 복도를 끝없이 오갔다.식사 자리에서 소찬식과 투닥이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평범한 밤이었다.하지만 다음 날, 소찬식을 깨우러 들어간 집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 잔잔한 행복을 깨버렸다.비몽사몽한 상태로 깨 눈시울이 붉어진 집사가 구급차를 부르는 모습을 봤을 때도 보호자로서 함께 병원에 온 지금까지도 소은해는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래... 그래 이건 꿈일 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날 혼내실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일이...’시간이 1분, 1초 흐르고 검사 결과는 여전히 감감무소식.마음이 다급해진 소은정이 일어서서 병실 창문으로 소찬식을 들여다보았다.비록 거리는 떨어져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소찬식이 느끼고 있는 고통이 그대로 그녀의 심장으로 전달되는 듯했다.약 40분 후, 다시 돌아온 한 원장이 내린 결론은 재수술이었다.하지만 소찬식의 나이도 있고 워낙 큰 수술이라 성공률이 확 낮아진 상태.그렇다고 수술을 하지 않기엔 심장이 언제 작동을 멈출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없는 상황이었다.임신 중인 한시연은 다른 병실에 잠깐 쉬고 있고 남은 네 사람이 무거운 표정으로 의논을 시작했다.다들 수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높은 리스크가 마음에 걸려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
오후가 되고 해외 의료진들이 도착하자 재검사가 시작되었다.하지만 결과를 확인한 그들의 표정 역시 밝지 않았다.“대표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15년 전 교체했던 판막에 손상이 많이 갔어요. 지금으로서 최선의 치료 방법은 수술뿐입니다.”“그럼 성공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아픈 가족을 둔 모든 보호자들이 보내는 절박한 눈빛, 의사로서 봐도 봐도 적응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100%라고 무조건 성공한다고 하고 싶었지만 의사기에 결국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40% 정도입니다. 환자분 나이도 있고 지금 상황이 워낙 안 좋아서...”절반도 되지 않는 성공률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럼 다른 의사가 한다면요? 이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는 누구죠?”과거 소찬식의 수술을 맡았던 학계에서 나름 존경하는 최고의 실력자가 있을 터, 그 앞에 무릎을 꿇어서라도 모셔올 생각이었다.그녀의 질문에 의사가 대답했다.“지금 심장 질환 분야의 최고 전문가는 박상훈 교수입니다. 게다가 박 교수는 15년 전, 회장님의 수술을 맡았었던 교수님의 수제자죠.”의사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특히 심장질환 재발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박 교수가 직접 집도한다면... 성공률이 대폭 상승할 겁니다.”15년 전, 소찬식의 수술을 집도했던 교수의 수제자란 말에 다시 희망의 불꽃이 솟는 듯했다.소은정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그럼 얼른 연락해 보자.”하지만 소은호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혹시 박 교수님과 친분이 있으신가요? 교수님의 추천이 있다면 얘기가 더 쉬울 것 같은데요.”소은호의 말에 의사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입니다. 다행히 친분이 꽤 있네요. 지금 바로 전화해 보죠.”전화 통화를 위해 의사가 잠깐 자리를 뜨고 소은정도 소은해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전동하는 여전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박상훈...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